마사다(Masada) 전투는 서기 73년경, 로마 제국과 유대 반란군(특히 젤롯당)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, 유대–로마 전쟁(제1차 유대 전쟁, 66~73년)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합니다.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 충돌을 넘어 저항과 절망, 자유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극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됩니다.
📍 배경
- 1차 유대 전쟁(66–73년): 유대인의 독립과 종교 자유를 위한 로마에 대한 대규모 반란.
- 예루살렘 함락(70년):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, 성전이 파괴됨.
- 마사다 요새: 반란군 중 일부가 유대 광야의 외딴 요새인 마사다로 도피하여 끝까지 저항함.
🏰 마사다 요새
- 지형: 사해 서쪽 절벽 위의 고원에 위치한 천연 요새. 사방이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음.
- 헤롯 대왕이 건설: 궁전, 곡식 창고, 목욕탕, 물 저장고 등 자급자족 가능한 구조.
- 수비대: 젤롯당 분파인 시카리당(Sicarii) 주도, 약 960명 정도(여성·어린이 포함).
⚔️ 전투 상황
1. 로마군의 포위 (72~73년)
- 로마군 지휘관: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(Lucius Flavius Silva).
- 병력: 제10 군단(Fretensis)과 보조 병력 포함 약 15,000명.
- 전술:
- 마사다를 완전히 포위.
- 탈출 방지용 성벽(포위벽, circumvallation) 길이 약 11km.
- 거대한 공성 경사로(ramp) 건설: 서쪽 사면을 따라 돌과 흙을 쌓아 만든 인공 언덕.
2. 공성 무기 사용
- 로마군은 공성탑과 투석기 등 로마식 장비 사용.
- 수개월에 걸친 인내와 전략으로 경사로를 통한 진입로 확보.
3. 최후
- 공격 전날 밤, 마사다 수비대는 회의를 통해 집단 자결 결의.
- 엘라자르 벤 야이르(Elazar ben Yair)의 연설: "로마의 노예가 되느니 자유인으로 죽자."
- 10명을 추첨하여 나머지를 죽이게 하고, 마지막 1명이 자결.
- 다음날 아침 로마군이 입성했을 때, 요새 안에는 숨겨진 2명의 여성과 5명의 아이들만이 생존.
🕯 역사적 의미와 해석
- 요세푸스(Josephus)의『 유대 전쟁사 』가 이 사건의 주된 기록.
- 자유와 항거의 상징: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군인들이 "마사다는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(Masada shall not fall again)"라는 맹세를 하기도 함.
- 일부 역사학자들은 집단 자결에 대한 기록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함 (요세푸스의 과장 가능성)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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